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어도어 루스벨트 (문단 편집) ==== 대외정책: 팽창주의로의 전환 ==== >"태평양 연안에서 미국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는 게 내 꿈이다." >"미국의 미래는 유럽에 면한 [[대서양]]보다는 일본, 중국에 면한 [[태평양]]에서 우리가 어떤 입지를 차지하느냐에 더 크게 좌우될 것이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 이후 이 말은 현실이 되었다. 세계의 무역중심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넘어갔다. 그후 유럽은 침체기를 맞고 아시아는 떠올랐다.] 19세기 [[먼로 독트린]] 이후 미국은 유럽에 대한 불간섭주의를 주창했다. 한편으로 미국은 유럽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태평양]] 쪽에 관심을 가지고 하와이 점령, [[쿠로후네 사건]]이나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의 정책을 펼치긴 했으나 소극적이었다. 그러다 이러한 [[먼로 독트린]] 하의 미국 대외정책을 전환하여 20세기 공식적으로 팽창적 제국주의를 표방한 것이 루스벨트였다. 물론 실질적으론 이미 전전임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 시절에 이러한 변화가 시작되어, 전임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시절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1898년)을 미국 [[제국주의]]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1901년 대통령을 승계받은 루스벨트는 전임자들보다 노골적인 팽창주의 정책을 내세우며, 미국의 제국주의 노선을 공식화했다. 루스벨트는 당시 일부 서구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었던 인종 개량주의와 [[사회진화론]]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그는 [[미국인]]이야말로 가장 진보한 인종이며, 그러한 미국에 의해 세계가 지배되는 것이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먼로 독트린]]을 수정하여 '''서반구에서는 미국이 국제경찰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정책을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장하게 되는 ''''세계경찰''''론을 처음 꺼낸 사람이 바로 루스벨트였다. 그리고 루스벨트의 세계경찰론은 현재 미국이 주장하는 그런 역할이 아니라 당시 열강들의 제국주의 정책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다만 이전까지 먼로주의와 상호 불간섭주의를 주장해왔던 미국이 갑자기 제국주의로 돌아서기에는 명분이 없기에 그 명분 차원에서 서반구에서 미국이 경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둘러 표현한 것. 그리하여 그는 해군 강화에 열을 올려 [[대백색함대]]를 창설했다. 덕분에 그가 퇴임하던 시점에 미국은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규모의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 [[파일:external/ocw.mit.edu/2002_3761_s.jpg]] || 세계경찰론을 자처한 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은 [[카리브해]]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개입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는 아메리카에서 유럽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미국 [[패권주의]]를 실현하려 했다. 그는 [[산토도밍고]], [[푸에르토리코]] 등 카리브해에 진출했고, [[베네수엘라]], [[도미니카]] 등 남미국가들에 개입했다. 한편, 남미 국가들의 [[부채]]를 갚아주는 유화 정책을 펼치며 그 나라들이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곤봉 외교'의 대표적인 일면으로 꼽힌다. 또 그는 경제적으로 커다란 가치를 가지고 있는 [[파나마 운하]]의 이권을 획득했다. 그는 파나마 운하의 획득을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생각했으며, 자서전에서 내각의 상의없이 자신이 독자적으로 추진한 업적임을 강조했다. 그는 파나마 운하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파나마 지역이 속해 있던 [[콜롬비아]]와 협상을 벌였으나 콜롬비아 정부가 루스벨트의 제시액보다 더 많은 돈을 요구하자 루스벨트는 [[파나마]] 주민들을 설득하여 파나마의 독립을 배후에서 조장했다. 그 결과 1903년 파나마가 콜롬비아에서 독립에 성공했고, 미국은 신생국 파나마를 자국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 외 [[미서전쟁]]의 결과 [[스페인]]으로부터 획득한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 역시 적극적으로 진출하여 미국식 제국주의 건설을 위해 애썼다. 루스벨트의 궁극적인 목표는 드넓은 [[태평양]]에 있었다. [[미서전쟁]] 직후 획득하게 된 필리핀의 처리를 두고 미국 내에서 의견이 분분할 때 루스벨트는 필리핀을 미국이 '''영구 지배'''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나선 이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또한 [[러일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와 일본 간에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했다. 그가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한 것은 궁극적으로 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담을 주선한 공로로 그는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조약을 통해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묵인했다.[* 이 시기 아무것도 모른 채 대한제국의 중립화 논의를 위해 찾아온 [[이승만]]을 만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만난 건 아니고,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1905년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태프트와 접촉했고, 태프트의 소개장을 통해 루스벨트와 만났다. 허나 이미 거래는 끝난 상황이었고(밀약을 TR이 조인한 지 닷새째의 시점이었다), "이렇게 하지 말고, 정식 외교 창구를 통해 공식적으로 제출하시오"라는 완곡한 거절의 외교적 수사로 돌려보냈지만, 미국을 일종의 이상향으로 생각했던 [[이승만]]은 자기가 속은 줄도 모르고 열심히 뛰다 종국엔 루스벨트에게 속은 걸 깨닫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